창작면허프로젝트

여섯 살에는 모두가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무언가를 만든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였고 배우였고 도예가였고 무용수였다.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 나는 라호르, 런던, 피츠버그, 캔버라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랐다. 세인트존스와 이스라엘 키부츠에서도 지냈다. 낯선 아이들과도 금세 친해져서 산악가로, 과학자로 변신놀이를  어울렸고, 소파 쿠션으로 요새를 만들거나 커다란 냉장고 박스로 극장을 만들기도 해다. 내 글과 그림으로 책을 만들기도 하고 학예회 연극에선 불난 집에서 사람을 구하는 강아지 역할을 하기도 했다. 멋진 검을 차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로저 왓포드경을 내 분신으로 생각했고, 홍차잎을 우려내 제법 그럴듯한 보물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1년 내내 할로윈 복장을 입고 지내기도 했다.

 그로부터 20년 후 나는 넥타이를 맸다. 이제 전화 통화할 때나 그림을 끼적대는 사람이 되었고 미술관이나 박물관, 놀이터엔 더 이상 갈 일이 없어졌다. 대신 TV로 골프중계를 봤다. 나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었다. 하긴 그보다 몇 년 전에 이미 예술가의 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지. 열여덟살에 대학진학을 위해 에세이를 썼는데, 왜 그림보다 글이 나 자신을 표현하는데 더 적합하고 요용한 매체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그건 아주 단순한 공식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화가는 가난하다. 고로 글이 모듬 면에서 사는데 훨씬 유용하다는 거다. 프린스턴 대학교에는 회화학부가 있었는데, 난 거기 학생들이 게으르거나, 자신에게 맞는 전공을 정하지 못했거나, 전문예술학교에 진학하지 못해서 마지못해 다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건축학과 학생들은 엄청나게 공부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기껏해야 1년에 3만 달러를 번다고 했다. 바보들 같으니라고.

 내 나이 스물한 살, 난 냉소적이고 융통성 없는 완고하고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회에 나갈 준비가 된건다. 돈을 벌려면 ‘상업적’인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에 예술학교엔 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끔찍한 절충안이었지만 더 좋은 직업관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지방 신문사에서 일한 경험으로 언론인은 참여자라기보단 단순한 관찰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은행에 취직한 친구는 돈과 타협한 배신자로 보았다. 졸업 석달 후, 난 광고계에 입문했고 일자리덕에 집에서 독립할 수 있었다. 잡지에서 본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은 예술가다.”라는 기사는 정말 그럴써 했다. 그 후 20년동안 광고는 내 직업이 되었다.

 광고업계는 크게 제작 파트와 회계 파트로 나뉜다. 제작파트는 아트디렉터와 카피라이터로 나뉘는데 나는 카피라이터였다. 광고의 시각적인 면에 대해서도 수많은 아이디어를 갖고 있었지만 내가 카피라이터라는 생각은 아주 확고했다. 나는 눈에 보이는 걸로 평가받는 사람, 다시 말해 예술가는 아니었던 거다. 그러나 내가 주재한 그 많은 미팅과 내가 판 상품들, 내가 성사시킨 모든 계약에도 불구하고 뭔가 만들고 싶은 가슴속의 충동은 쉽게 누그러들지 않았다. 그래서 무엇보다 광고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사진작가들과 감독들, 편집자, 작곡가들과 함께 30초를 빛내기 위해 일했다. 우린 이 과정에 너무나 열정적으로 임했기 때문에 모델이 입고 있는 블라우스에 드리운 작은 그림자나 쉼표의 위치 같은 아주 사소한 것에도 집착했으며, 창작 의지를 관철하는 데 나무나 열중해서 항상 전투 태세였다.

 하지만 내 안의 예술가는 숨겨진 동성애 기질이 그렇듯,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나는 예술에 자질이 없으며 예술은 비현실적이고 엄청난 시간 낭비일 뿐이라고 애써 부인하려고 했지만, 창작의 욕구는 어디에선가 튀어나오곤 했다. 난 ‘화가’는 아니었다.(집에서 그림을 그리긴 했다. 이젤을 살 생각이 없어서 의자에 캔버스를 올려놓고 그렸다.) 또한 학교 때부터 써오던 소설도 그만뒀으니 진정한 ‘작가’도 아니었다.

 스물두 살 되던 해, 희곡을 하나 썼는데 몇몇 제작자들이 관심을 보였고 유명배우인 케빈 베이컨을 필두로 대본 연습도 했다. 오프브로드웨이의 헨리밀러 극장에서 공연을 하기로 한 단계까지 일이 커졌지만, 난 그저 지켜보는 방관자일 뿐이었다. 일은 눈덩이처럼 커지다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공연을 재개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뭐, 사실 지금 내가 그 대본을 갖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또 키보드를 구입하고 세 번이나 음악교실에 등록을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일이 너무 바빠 시작한지 일주일쯤 지나면 연습과 수업을 빼먹게 되었다. 가구를 직접 디자인해서 만든 적도 있다. 멋진 단풍나무로 아파트에 어울리는 가구를 손수 만들었지만 곧 값싼 이케아가구로 대체했다. 뉴욕술집에 대한 재미난 수필을 쓰기로 계약한 적도 있는데 한 250쪽쯤 썼을 때 편집자가 바뀌었다. 새 편집자가 수정을 요구했을 때 내가 거절하자 그 책은 결국 날아가버렸다. (하지만 미리 받은 선인세는 지킬 수 있었다.) 퇴근 후에는 싱크대에서 혼자 먹을 음식을 만들면서도 마음에 드는 칼을 구하기 위해 몇 달을 애쓰고, 손수 양념을 다지고 반죽을 밀어서 정성스레 저녁을 준비했다. 옷차림새에도 신경을 써서 핸드메이드 수트를 사려고 빈티지 옷가게를 이잡듯이 뒤졌고, 수백개의 넥타이를 샀으며 맘에 들 때까지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고 물이 식을 때까지 선물 받은 하모니카를 불기도 했고, 가족 중 누군가의 생일이면 정성스레 선물의 주제를 정하고 직접 만든 포장지로 싸서 선물했다. 1년에 수백 편씩 나오는 신작 영화들을 다 봤는데, 직업상 필요한 일이기도 하고 덤으로 소득공제도 되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하곤 했다. 영화를 볼 때는 진지하게 카메라의 위치를 기억하고 편집기법을 메모하고 세트 디자이너가 누구인지 꼼꼼히 살펴봤음에도 말이다.

 여자친구에겐 정말 정성을 다했다. 그녀만을 위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손수 책을 만들어 선물했다. 직장 상사를 꼬드겨 레이저프린터를 사게 한 다음, 사람들 몰래 특수용지에 프린트해서 책을 만들어 표지도 입히고 서체도 손수 디자인했다. 완벽해질 때까지 모든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손봤다. 책 한권을 만들기 위해 몇 달씩 걸리기도 했는데, 그때는 사랑 때문에 만든다고 생각했지 내가 좋아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엔 아내를 분장시켜 재미있는 장소에 데리고 가 홈무비를 찍기도 했다. 단지 멋지다는 이유로 구입한, 길이 5.5미터에 무게도 2톤이나 되는 밝은 보라색과 흰색의 1962년형 머큐리 몬테리에 태우고 말이다. 그 차는 맨해튼에서 타기엔 너무 컸다. 솔직히 잘 몰고 다니지도 않았고 그저 장식으로 광을 내서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면 전환. 또 십년에 지나갔다. 난 결혼했고 아들과 13킬로그램의 지방을 얻었다. 나는 성공 가도를 달려 내 분야에서 최고과 되었고 회사의 제작 부서를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숨이 막혀갔다. 다른사람에게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도록 종용하는 건 엄청난 스트레스였고 그 모든 것에는 돈이 관련되어 있었다. 우리의 노력은 언제나 엄중하게 평가받았다. 나는 지금까지 진정한 나의 삶이 아닌 가식의 삶을 살았다는 걸 천천히 깨달아 갔다. 내가 가진 창조적 능력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돈벌이로만 써먹은 것이다. 그 과정에 즐거움이란 없었다.

 지금까지 난 투자은행, 무기상, 화학회사와 경영 컨설턴트들을 위해 광고를 만들면서 온전히 타인의 요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했던거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난 완전히 파산한 기분이었다. 자신읠 위해 한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고 난 불면증 환자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기 몇 해 전에 내게 큰 힘이 된 욕구의 배출구를 찾은 적이 있긴 했다. 일상에서 보는 사소한 것들을 그려 그림일기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꽤 잘 그렸던 것이다. 난 북바인딩 수업도 듣고 나만의 책을 만드는 법도 배웠다. 한동안 그건 굉장한 탈출구였으나 역시 그만둬야했다. 나는 회사의 수익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그런 시시한 일을 하는데 쓸 시간이 없었다. 일기를 치워두고 하루 24시간, 5년동안 온종일 일에만 매달렸다. 아내가 내게서 멀어진 것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일 외에는 만나는 친구도 없었고 있다해도 그들을 만날 시간이 나질 않았다. 요리, 패션, 선물 만들기 등으로 표현했던 창작의 열정들은 이제 100퍼센트 고객에게로 향했다.

 결국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직업상 알게된 스테판 자그마이스터, 우디 피틀, 폴 사레같은 최고의 그래픽디자이너와 만나면서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을 얼마나 싫어했으며, 얼마나 커다란 상실감을 갖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멘토였다. 사람들을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만들고,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사회에 일조하고, 하기 싫은 일은 거절하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한,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이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그들 중 한 명잉 그림일기를 다시 시작하면 어떻겠냐고 했을 때 난 머뭇거렸지만, 결국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내 안의 창작혼을 다시 불러들이는 순간 나를 가로막고 있던 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한달도 되지 않아 출판계약을 하고, 몇 달 후에는 내 그림일기로 두 번째 출판 계약을 성사시켰다. 일러스트 책과 잡지에 내 그림이 실렸고, 난 근사한 에이전트도 갖게 됐다. 또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작곡하는 전 세계의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을 방문할 계획도 갖고 있다. 난 더 이상 ‘관리 감독아래’ 있지도,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지도 않는 나 자신이 된 것이다.


-시작하는 글 중-

[출처]창작면허프로젝트| 대니 그레고리 지음 | 김영수 옮김

 

 

by Peter | 2009/11/13 23:27 | 오늘 그리고 내일 | 트랙백 | 덧글(0)

땅끝에는 갈데가 없다.

<땅끝>
<갈대>

휴가를 받아서 어머니와 땅끝에 서있다 왔다.왕복 12시간 운전...

'땅끝에서는 더 이상 갈데가 없었다.'

by Peter | 2009/11/06 19:58 | 트랙백 | 덧글(0)

신종감기

감기라는 것이 시도때도없이 변종에 변종을 거듭하는 것일텐데,
이토록 연일 메스컴에서 톱기사를 차지하는 것을 보면 대단한 놈은 놈인가보다.
그리보면 컴퓨터 바이러스를 실시간으로 대응하고 방어하는 것은 정말 최첨단 기술력이었군.
오늘도 아내는 국민건강증진을 위해 약을 보급하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신종이 아닌 구종바이러스에 걸려
골골되고 있으니. 나이거 참...
그런 와중에 나는 타미쁠루의 각통 디자인을 생각하는것은 어쩔수 없는 직업병? 한국어판 타미플루도 시판됬다고 하던데
아내왈'외국제약회사 약들은 글씨만 있는게 대부분이고 한국제약회사 약통들은 색깔이 들어간것이 특징이얌' ..음 그렇구나.

by Peter | 2009/11/04 21:16 | 오늘 그리고 내일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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